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대학입학 예비고사 (문단 편집) == 상세 == 한국의 대학 입학 시험 제도는 광복 후부터 1969년 이전까지는 각 대학에서 자체적으로 출제하고 선발하는 [[대학별고사]] 위주였다. 그러나 국가가 주관하는 시험이 전혀 없던 것은 아니다. 1954학년도에는 대학별고사 전에 자격 시험으로 대입연합고사가 치러졌으나 1회 시행 후 폐지되었다. 1962학년도에는 대학별고사가 금지되고 대신 국가 주관의 대학입학 자격고사가 시행되었고 1963학년도에는 대학별고사와 병행하여 치러졌으나 결국 2회 시행 후 폐지되었다. 1969학년도 입시부터 국가에서 실시하는 '''대학 입학 예비고사'''가 시행되면서, 대학별고사는 '본고사'라고 불리게 되었다. 시험 출제 방식은 [[체력장]] 20점 포함 340점 만점 체제로 고교에서 이수되는 대부분의 과목을 포함한 사지선다형이었다. 거의 전과목을 다 보니 지나치게 많아 암기 위주의 입시 공부가 시작되는 안 좋은 전통을 남겼다. 현재의 수능 체제에서 과목 수가 줄어서 非수능 과목을 등한시하는 고등학생들이 많아진 것을 보면 장점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사실 윤리나 국사는 물론이고, 사회나 과학 등의 과목은 대학에서 공부를 따라갈 실력이 되는지 측정하는 "대입 전형"의 본래 취지와는 거리가 있다. 첫 시험은 1968년 12월 19일에 실시됐다. 1969년 1월 4일자 [[동아일보]]의 사설에 따르면, 총 응시자 11만 2천여명 가운데 대학 총 정원의 1.5배수인 6만 1천여명을 합격시켜 합격율은 50%를 약간 상회하는 정도였다고 한다. 당시 컷오프는 340점 만점에 210~220점 정도였다고 한다. 초창기에는 예시는 통과만 하면 그만이고 본고사만으로 전형을 했으나, 이후 예시의 반영 비율이 대폭 늘어났다. 1979학년도에 처음 생긴 [[전문대학]]은 [[교육대학]](당시 2년제)[* 교육대학은 1980년대 들어서 점차 4년제로 개편되었다.]과 함께 본고사 없이 예시와 내신으로 전형을 했다. 예비고사-본고사 체제는 1980학년도까지 유지되다가, 1981학년도에는 본고사가 폐지되면서 예비고사만 치러졌다. 1982학년도부터는 예비고사의 명칭이 [[대학입학 학력고사]]로 변경되었다.[* '본'고사가 없어졌으므로 '예비'라는 의미도 없어짐] 당시 영어 과목은 강세, 발음, 동의어·반의어 문제가 수록되었다. 여담이지만 당시 예비고사 수험번호는 응시원서 접수 순서대로 발부되었다. 다시 말해 접수번호가 곧 수험번호인 셈.[* 그래서 전교 1등 뒤에는 일진들이 버티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당시 대학 접수 방식은 지망하는 시도를 3지망까지 적었다고 한다.[* 이를테면 1지망에 서울, 2지망에 경기도, 3지망에 자신의 고향이 있는 시도를 적는 식.]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